진정성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규범
“나답게 살아라.” 이 문장은 한때 자유의 선언처럼 들렸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존중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문장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진정성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자아 성찰이 아니라, 자기 검열의 문장이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성은 새로운 미덕으로 여겨진다. 솔직하고, 꾸밈없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 이런 인물상이 진정성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표준’은 이미 모순이다. 진정성은 본래 타인의 기준으로 측정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적 진실이지만, 사회는 그마저도 외적인 형식으로 규정해버린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해 보이는’ 연기를 시작한다. 그 연기의 아이러니는, ‘진짜’로 보이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SNS는 이 진정성의 강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무대다. 사람들은 일상의 단편을 올리며 진심을 표현한다고 믿지만, 그 진심조차 ‘보여주기 위한 진심’이 된다. 자연스러움을 연출하고, 꾸밈없음을 계산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야”라는 말 속에는 이미 연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결국 진정성은 표현의 문제를 넘어, 존재 자체의 불안과 연결된다. 나의 삶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판단의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진정성은 자기 계발의 새로운 형태가 되었다.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명상하고, 여행하고, 기록한다. 그 과정은 의미 있지만, 때로는 끝없는 자기 검증으로 이어진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일까?”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한가?” 이 질문은 성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을 확장시킨다. 나 자신에게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진정성의 강박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답게’라는 환상, 선택의 피로
‘나답게 살라’는 명령은 자유를 약속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규율이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이제 불행은 사회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잘못이 된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네가 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이런 담론은 진정성을 미덕으로 포장하면서, 실제로는 불행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준다.
‘나답게 살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상황 속에서 변하는 유동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사람마다 보여주는 나도 다르다. 그럼에도 사회는 일관된 자아, 흔들리지 않는 ‘진짜 나’를 요구한다. 이 요구가 강할수록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그 ‘진짜 나’를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끝없는 모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인간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에게 진정성은 어떤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숨기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러나 현대의 진정성 담론은 이 유연함을 잃었다. 오히려 자기 동일성, 일관된 자아,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강조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가 되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불안을 감춘다. 진정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진짜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남보다 덜 꾸며야 자연스러워 보이고, 남보다 솔직해야 진정해 보인다. 그러나 솔직함마저 경쟁이 되는 순간, 진정성은 또 다른 자기 관리의 형태로 변한다. 이때의 ‘나’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인정할 만한 수준의 진정성, 타인의 눈에 납득될 만한 ‘자기다움’이다. 결국 ‘나답게 살라’는 명령은 사회가 설정한 기준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로 바뀐다.
진정성의 강박은 또한 ‘선택의 피로’를 불러온다.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으로 환원된 시대에서,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이 불안은 완벽한 자아를 향한 강박으로 이어진다.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은, 끝없이 반복되는 선택의 고통이 된다. 결국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너무 무겁다.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타인의 기준으로 돌아가 안도한다. 그때의 안도감은 패배가 아니라 휴식처럼 느껴진다. 진정성의 강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의 피로를 생산한다.
진정성을 회복한다는 것,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
진정성의 회복은 ‘진짜 나’를 찾는 일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진정성은 투명함이 아니라, 모순의 인정이다. 사람은 언제나 일관되지 않고, 감정은 흔들리며, 자아는 순간마다 변한다. 이 유동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성이 생긴다. 진정성은 자기 확신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의심 속에서 자란다.
“나답게 살라”는 말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그 말이 한 방향의 해답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진정성에는 정답이 있고, 그것을 찾지 못하면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진정성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것은 ‘이게 나야’라고 선언하는 순간이 아니라, ‘나는 아직 나를 알아가는 중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완성하려는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 사회를 ‘진정성의 윤리’로 규정하면서, 그 위험성을 동시에 경고했다. 진정성이 지나치게 개인화될수록, 공동체의 관계성과 사회적 책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나답게’라는 말은 결국 ‘나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 수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둔감해지고, 공감보다는 자기표현이 중심이 된다. 이것이 진정성의 역설이다. 진정성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심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나답게’라는 명령에서 벗어나 ‘함께’라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진정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내가 누군가에게 솔직할 수 있을 때, 그 사람 역시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 이 상호적 진실성의 순간이 바로 진정성의 본질이다. 즉, 진정성은 나 혼자만의 완결된 자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열린 정체성이다.
진정성의 강박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꾸며야 할 때는 꾸밀 수 있다는 유연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때로는 ‘진짜 나’보다 ‘상황에 맞는 나’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사회적 지혜다. 진정성은 언제나 솔직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배려하며, 나의 감정을 상황 속에서 조율할 줄 아는 성숙함에서 나온다.
결국 진정성의 회복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확신보다, “나는 여전히 변화하고 있다”는 수용에서 비롯된다. 그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진정성은 부담이 아니라 자유가 된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완벽한 자기 일관성이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성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에 가까워진다.
결론
진정성의 강박은 현대인의 새로운 불안을 만든다. 진정해야 한다는 강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감시하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혼란을 느낀다. ‘나답게 살라’는 말은 자유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자기 검열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 말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완벽한 상태가 아닌 살아 있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진정성은 고정된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나를 인정하는 행위다. 그것은 솔직함과 동시에 유연함이며, 자기 중심성과 동시에 관계의 감각이다. 진정성의 본질은 완벽한 일관성보다, 불완전함 속의 정직함에 있다.
“나답게 살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자기 자신을 억누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심문하지 말라는 뜻이어야 한다. 진정성은 성취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숨결이다. 그 숨결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성의 강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